중부일보

여전히 '옷 잘 입는 남자' 꿈꾸죠… 50년 옷 지은 남자 장준영 대표   

안경환 2017년 10월 31일 화요일


이마에는 깊고 옅은 주름 수가닥이 선을 그었다.

눈꼬리와 눈 밑도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팔자주름과 맞닿은 입가 주변 역시 자기 자리인 양 주름이 빠지지 않았다.
미소는 맑았다.
미소 속에는 편안함이 담겼다.
중년 남성의 얼굴은 그가 살아온 인생이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미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들었지만 이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미소다.
커피잔을 드는 손은 유독 눈길을 끌었다.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 체구에 비해 손가락 마디마디는 굵었다.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는 수없이 상처가 나고 아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평생을 일에만 몰두한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어깨와 등은 굽었고, 무릎은 제대로 펴지지도 않았다.
걸음을 걸을 때도, 서 있을 때도 무릎은 언제나 15도 정도가 굽어져 있었다.
다쳐서도 병때문도 아니다.강산이 7번 변하면서 쌓인 세월의 흔적,아니 고된 인생이 남긴 흔적인 셈이다.



 

 

바로 최고급 맞춤 남성복 장인(匠人) 봄바니에(Bom Boniere) 장준영(68) 대표다.

그가 인생을 허투로 낭비하지 않았음은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나 유명 연예인이 즐겨 찾아서가 아니라 고객 하나하나를 맞이하는 그의 미소만으로도 짐작케 했다.
매장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서자 찻잔을 내려 놓고 몇마디 얘기를 나눈 뒤 이내 체촌에 들어갔다.
체촌은 패턴·재단, 가봉, 봉제, 완성복 등 5단계로 구성된 수제양복 제작의 첫 과정이다.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체형의 모든 부분을 세분화하고 정밀하게 체촌, 재단에 반영해야만 그 사람에 가장 잘 맞는 옷을 만들 수 있어서다.

 

 

 

 

 

그 역시 체촌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오늘날의 그가 복장업계의 장인으로 설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체촌에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여느 수제양복점보다 2~3배 시간이 더 걸린 셈이다.
목둘레와 어깨 너비, 어깨의 굽어진 각도, 팔길이, 상반신 등 신체 부위부위가 37개 부분으로 세분화됐다.
부문별 사이즈를 측정하는 그의 손 동작은 느린듯 느린듯 느리지 않았다.
오히려 거침 없었다.
신체 부위를 세분화해 사이즈를 측청한 뒤에는 5㎝ 간격의 눈금이 표시된 스크린 앞에서 자세를 촬영한다.
촬영 역시 전신, 앞, 뒤, 옆, 상·하반신 등 부위별로 나눠진다.
체촌에만 줄자, 각도기, 기역자, 카메라 등 10여가지의 기구가 동원됐다.
이들 기구 모두 장 대표의 수제품이다. 

 

 

 

특히 장 대표가 신경을 쓰는 부문은 고객의 좌·우 비대칭.
사람의 체형은 어깨의 쳐진 정도, 앞 가슴과 등품 너비, 골반의 높이 등 좌·우 사이즈나 높낮이가 대부분 다른 비대칭이다.
이 비대칭 부문을 바로 잡아야 착장 시 좌·우 어느 한쪽이 남아서 운다거나 겹치는 등의 현상이 없어진다.
장 대표는 “비대칭인 체형을 비대칭 체형으로 보이지 않게 반듯한 실루엣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개개인에 잘 맞는 옷”이라며 “이를 위해 체촌 시 체형의 모든 부분을 세분화하는 100% 단촌식(입체기법)을 기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어떠한 사소한 것도 흘려 보지 말고, 유심히 생각하며 봐야 한다’는 장 대표의 소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장 대표는 전남 순천 출신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10대 후반, 애떈 청소년 이었던 장 대표는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그는 1966년 9월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도 준다는 곳이 있다기에 문을 두드렸다.
한국폴리텍대의 전신인 국립직업훈련원 양복학과다.
양복학과 선택은 단순히 다른 학과에 비해 모집인원이 많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는 국내에서 맞춤양복의 붐이 일던 시절(1960~1970년대) 이기도 하다.
그렇게 남성복과 인연을 맺었다.
장 대표가 50여년 이란 세월동안 남성복을 탐구하는 장인의 길을 것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1960년대, 영호남으로 대변되는 지역감정이란 단어가 발생한 시초가 된 시기다.
당시 전라도 지역은 산업화에 소외되면서 소작농 수백만이 일시에 빈민층으로 대거 전락, 타 지역으로의 이주가 많았다.
당연히 무시받지 않기 위해 더 악착같이 살아야 했고, 타 지역 출신보다 트러블도 더 많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믿지 못한다, 표리부동하다’ 등 이들을 혐호 하는 말 뿐이었다.
전라도 출신들을 전라도 치라고 부르기도 했다.
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그러기에 장 대표는 훈련원부터 다른 사람과 차별성을 부각 시켜야 했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이유, 사소한 것도 흘려보지 않고 유심히 생각하며 봐야 했던 이유다.
장 대표는 직업훈련원을 마친 뒤 견습 재단사로 한 양복점에 들어갔으나 그 곳에서 쫓겨나기까지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급한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온 사투리가 화근이었다.
양복점에서 일하는 데신 말을 하지 말라는 조건, 즉 전라도라는 출신을 감추라는 조건을 어긴 셈이 돼서다.
장 대표는 “당시 전라도 출신들은 어느 곳에서도 쉽사리 발을 붙이지 못했다. 아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쓴 웃음을 지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몇몇 양복점에서 견습생 생활을 하던 장 대표는 1971년 서울 명동 코스모스양복점 재단사로 들어갔다.

 

 

양복점을 인수한 것은 1977년.

현 매장인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지하로 이전한 것은 7년 뒤인 1984년이다.

성실함 하나로 7년의 세월을 버텨온 장 대표는 양복점을 인수한 뒤부터 보다 체계적이고 차별적인 매장 운영에 나섰다.

양복의 버튼, 바지의 허리선, 슈트의 깃 등에서 차별성을 주기 시작했다.

고객의 몸을 직접 만져가며 일일이 체촌하고, 고객들의 체형 사진도 일일이 찍어 기록했다.

목표는 단 하나, 고객의 몸에 맞는 가장 정확한 옷을 만드는 것이다.

정확한 치수를 재기 위한 10여 가지의 체촌 기구가 개발, 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40여년을 함께해온 이 기구들은 이제는 장 대표와 한 몸이나 마찬 가지다.

결국 이들 체촌 기구와 체형 사진 기록은 장 대표가 비대칭으로 이뤄진 인체를 보완, 몸에 꼭 맞는 맞춤양복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됐다.

장 대표의 목표는 어려우면서도 간단하다.

바로 사람들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을 짓는다는 것.

또 사람들이 옷을 잘 입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피부처럼 몸에 잘 어울리고, 조화와 균형을 이룬 옷은 입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어서다.

직업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양복이나 셔츠·넥타이의 색상, 화사함 정도를 고려해 선택하면 신뢰감·좋은 인상을 더 심어줄 수 있다고 장

 

 대표는 설명했다.

이 때문에 장 대표는 옷은 ‘메시지’이자 ‘제2의 피부’라고 강조하고 있다.

장 대표는 “남성에게 양복이란 여성이 아름다움을 메이크업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얼굴을 제외한 신체의 95%를 옷으로 감싸게 되

 

는 데 신경을 쓰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의 앞 단추의 경우 투 버튼은 위만, 쓰리 버튼은 가운데만 잠그는 게 그가 추천하는 옷 잘 입는 방법 중 하나다.

셔츠는 목 뒤에 나오는 만큼 소매가 나오는 것이 원칙으로 통상 1~2㎝ 정도 보이는 게 좋으며 하의는 바닥에서 5㎝ 올라오는 게 일반적

 

인 길이다.

요즘 젊은 층이 요구하는 슬림형은 7~8㎝ 정도가 올라간다.

넥타이 역시 본인의 피부색, 양복색, 셔츠색 드을 고려해 선택해야 한다.

장 대표는 ‘당신의 선택권을 과감하게 포기, 전문가의 조언에 경청할 것’을 주창해왔다.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거나 남의 눈을 핑계 삼아 무난한 옷만 찾다보니 천편일률적인 슈트만 고르기 일쑤여서다.

몇 해 전부터 고객과 대화를 통해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고 있다.

고객에 가장 잘 맞는 옷도 만들고, 고객의 만족도도 높이는 두 토끼를 잡는 셈이다.

이면에는 시대흐름에 맞춰 유심히 생각하고, 변화를 꾀하는 장 대표의 사고가 내포돼 있다.

복장업계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직종은 아니다.

후학 양성을 묻는 질문에 장 대표는 “우리나라는 20세 이하에 자격이 주어지는 세계기능올림픽 양복부문에서 12연패한 저력을 지녔

 

다”는 말로 대신했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는 고등학교 수준의 학업을 마친 뒤 업계에 들어서는 반면, 우리나라는 학업에 상관없이 어린나이에 입문하는 경

 

우가 많다. 어찌 보면 우승은 당연한 것”이라며 씁씁할 표정을 지었다.

이 때문에 장 대표는 법 개정을 통해서라도 학업과 기술을 동시에 습득할 수 있는 국비 훈련원이 세워지길 바란다.

그의 변화와 노력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시스템맞춤이 바로 그것으로 고급 수제 맞춤양복의 기술력은 유지한 채 가격은 낮춰 보다 많은 계층의 고객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50년의 세월, 복장업계 장인을 넘어 ‘설계사’를 꿈꾸는 그가 최근 읽고 있는 책은 ‘옷 잘입는 남자’다.

안경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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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DATE   2018-07-02 18: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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